제주도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섬 한가운데 불쑥 솟아있는 한라산만을 바라본다. "정말 웅장하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섬 전체를 감싸고 있는 한라산. 하지만 그 한라산의 웅장함도 368개의 오름이 없다면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의 몸매를 갊은 용눈이 오름

처음 알았다. 여섯 번째 제주도를 찾으면서 이곳에 368개의 오름이 있다는 것을...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올라가느냐' 는것이 평소 등산에 대한 나의생각인지라

한라산은커녕 오름조차 오를 생각을 하지않았다.

  하지만 이번 제주도 여행만큼은 오름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첫번째 코스인 용눈이오름은 등반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완만하다.

  해발 247.8m이지만, 차량이 근처까지 올라갈 수 있어 실제 등반 높이는 88m 정도이다. 억새풀이 에워싸고 있는 길을 벗어나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10여 개의 무덤들과 길 전체에 자유롭게 흩어져 있는 소의 분비물이었다.‘ 좀 치우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바로 오름 아래쪽에 자유롭게 풀어져 있는 소들을 보며‘제주인들에게 오름은 생활 터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제주인들에게 오름은 삶 그 자체다. 일제 강점기나 천주교난, 원나라의 침략이 있던 그 옛날 오름은 봉화대 역할을 했고, 오름을 방패 삼아 항쟁을 했다고한다. 그들은 평화로운 시절에는 초지에 말과 소를 풀어 생활을 했고, 죽으면 오름에 묻혀 후손들을 지켜봤다.

10여 분 정도를 올랐을까? 어느덧, 오름의 정상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여러 개로 이어진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형체라 해서‘용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정상에서 바라본 3개의 분화구는 부드러운 여성의 몸매를 보는 듯 매끈하게 이어져 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앉았던 우리는 올라오면서 봤던 저 아래 소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없이 한가로워 보이는 소들의 모습은 마치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비물을 피해 벌러덩 드러누웠다. 조용히 눈을감고 바람의 촉각을 느끼며, 소치기 소년의 여유를 즐겼다. 잠깐 잠이 들었을까.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서 남녀가 섞인 10여 명의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오고 있다. 그 뒤를 10여 명의 어른들이 여유롭게 따라온다. 주말을 맞아 여러 가족들이 소풍을 온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 모임으로 한달에 한 번 모임을 갖는다는 고관 씨 일행. 그중 그는 제주 오름 마니아다. 용눈이오름은 경사가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를 수 있어 이번 모임은 특별히 이곳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들처럼 오름은 제주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예로부터 생활 터전이었기에 오름이 주는 특별함도 있겠지만, 이들에게 오름은 타지인들처럼 관광지가 아닌 뒷동산일 것이다. 점심때임에도 아무런 준비 없이 맨몸으로 올라온 우리의 허기짐이 그들에게 보였을까. 그들은 준비해온 김밥 네 줄을 떡하니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각자 한 손에 김밥을 들고 입 안에 한 개를 휙 집어넣고 내려오면서‘저들의 마음이 마치 이 능선 같다’는 생각을했다. 낯선 이들의 어설픔을 감싸 안아주는 능선 같은 넉넉함.

험난한 역사를 대변하는 손길,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정상에 오르면 마치 손 안에 잡힐 듯 눈앞에 불쑥 솟아 있는 오름이 보인다. 바로 다랑쉬오름이다. 겉보기에도 거칠어 보이는 다랑쉬오름은 낯선 이들을 쉽게 받아들이기 싫었는지 오름의 입구를 찾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헤맨 끝에 찾은 다랑쉬오름은 높이 382m로 그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등산객들이 무분별하게 헤치고 다녀 수많은 식물들이 죽어가 아예 밧줄과 고무를 이어 등산로를 만들었다. 자연보호와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지만, 그탓에 용눈이오름을 오를 때 발밑에서 느껴졌던 푹신함은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절반 이상 오르기까지는 양옆에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오로지 위만 바라보고 올라야 한다. 용눈이오름이 타지인의 발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면, 다랑쉬 오름은 다소 배타적으로 거친 급경사를 이룬다. 30분 남짓 올라가는 경사를 내가 유난히 거칠게 느낀 것은 어쩌면 이곳에 담긴 슬픈 역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948년 이전에는 오름 주변에 꽤 큰 ‘다랑쉬마을’이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으로 현재 그 마을은 단지 푯말만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이 돼버렸다. 오름에는 제주인들의 기쁨과 슬픔이 모두 담겨 있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일행 중 가장 늦게 정상에 오른 나는 건망증 환자처럼 좀전의 힘듦은 까맣게잊고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잠시 넋이 빠졌다. 거신巨神‘설문대할망’이 치마로 한 줌씩 흙을 집어다 놓은 것이 오름인데, 유난히 너무 도드라져 있어 주먹으로 딱 친 것이 파이면서 생겼다는 다랑쉬오름의 분화구는 달처럼 둥글어 보인다. 이 분화구는 백록담과 같은 깊이 115m로 산 자체 높이의 절반이 움푹 파여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잠시 눈을 돌려 등산로 입구 반대편 정상을 바라보니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이들이 보인다. 몇 년 전부터 이 곳은 패러글라이딩 마니아들의 천국이 됐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역사적 아픔이 있는 이곳에서 아슬아슬하게 하늘 위를 자유롭게 누비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씁쓸한 기분마저 든다. 지나친 감정일까.

다랑쉬오름은 내려가는 발걸음도 쉽게 놓아주질 않는다. 아찔할 정도의 급경사 때문에 더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며 내려가던 우리는 어느덧 올라올 때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되었다. 정상만을 바라보며 올라온 내 등 뒤에 펼쳐졌던풍경, 한없이 답답해 보였던 나무 하나하나, 유난히 빨간 등딱지가 돋보인 무당벌레들까지…. 아마 오름은 혹시라도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모두 보지 못할까봐 그렇게 발걸음을 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름이 만든 또 하나의 섬, 비양도 한림 방향으로 나 있는 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 솟아 올라 있는 섬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제주도 기념물 제48호인 비양나무가 유일하게 자라고 있다는비양봉이다. 그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비양도에 들어가야 했다. 중국에서 날아온 섬이라는 이야기도 있고,서기 1002년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 비양도. 우도나 마라도처럼 유인도임에도 잘 알려지지않았던 이곳은 드라마 <봄날>로 인해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혹여 그 유명세를 타고 관광지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잠시, 비양도는 한적했다.

한림항에서 오전 9시, 오후 3시 하루 두 차례 운행하는 여객선을 타고 도착한 그곳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갈색 빛의 안내견이었다. 낯선 방문자가 두렵지 않은지 비양도의 안내견은 섬 입구까지 앞장서 우리를 안내했다.

114m 높이의 비양봉은 그 입구에서부터 주변 경관이 빼어났다. 금빛 물결을 자랑하는 억새풀과 해안도로를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그리고 그 앞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바다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다랑쉬오름을 겪고 난 후라 그럴까. 114m의 비양봉을 오르는 것은 너무 쉬웠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다른 오름은 정상만을 바라보고 올랐지만, 비양봉은 올라가는 이들의 발길을 그냥 두지 않는다. 대나무가 많아‘대섬’으로 불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나무가 울창하게 뻗어 있는 코스를 지나면 억새길이 우리를 반긴다. 억새의 유연함도 마음을 흔들었지만, 우리의 마음을 더욱 흔들리게 했던 것은 바로 섬에서 바라본 제주의 모습이었다. 제주에서 비양도를 바라봤을 때는 마치 조그마한 바위 같더니, 비양도에서 바라본 제주의 모습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비양도 사람들이 왜 굳이 제주도로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들에게는 제주도든 비양도든 결국 다 똑같은 섬일 뿐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정상에 올랐다. 2개의 분화구가 있는 비양봉은 소나무, 으름나무, 팽나무, 섬오가피나무, 비양나무로 가득 차 있어 마치 산 하나를 깊숙이 숨겨놓은 것 같다.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환호성을 질렀다. 가슴까지 시원해질 정도로 확 트인 전망과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마을의 모습, 그리고 우리 일정의 마지막 오름이라는 것에 기뻐했다.

다시 한림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에 허기를 느낀 우리는 식당을 찾았다.‘ 식사 됩니다’라고 푯말을 끼어놓은 곳이 있어 들어선 그곳은 마치 우리네 옛 외갓집의 모습과 같았다. 나무 마루에 커다란 상 하나 달랑 펴져 있는 곳. 그곳에서 라면을 주문하자 잠시 후 4개의 라면이 하나의 큰 솥에 담겨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그릇에 4개의 젓가락을 모두

담갔다.

뉘엿뉘엿 제주의 해가 지려고 한다. 지는 해를 뒤쫓아 급하게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용두머리.

시간이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듯 낙조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어지고 용두머리를 찾은 관광객들도 하나 둘 숙소를 찾아 떠났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용두머리에는 갓잡은 해산물을 좌판에서 팔던 늙은 해녀들만이 남겨졌다.

사위를 둘러보고 그제야 늙은 해녀는 짐을 싸기 시작한다. 달그락달그락. 등에 한가득 짐을 메고 가는 뒷모습이 복숭아 빛으로 물든 바다에 걸쳐진다.

오늘도 남루한 옷을 걸친 늙은 해녀는 진정 갚진 바다의 보물을 전해주었다는보람을 짊어지고 집으로 향한다.